❝그쪽 분이 무슨 일을 하시든,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나중에는 그쪽 분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거예요. 그쪽 분은 황무지라고 말씀하시지만, 나중에 그쪽 분이 기억하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눈부시도록 정밀하게 채워질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아직 시작되기 전인 거 같아도, 이미 시작되어 있거든요. 아직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같아도, 이미 뭔가 하고 있거든요. 답을 찾으러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와, 답이 내 뒤에 있는 거예요. (41쪽)❞
❝사는 게 힘들다는 거, 저도 알거든요. 그만큼 즐겁다는 것도 알고요. (93쪽)❞
❝저는 스무 살인데요. 제가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일이 이렇게 되도록 말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앞으로 세상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세요. (110쪽)❞
백 여 쪽이 겨우 넘는 짧은 이 소설은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온 스무 살의 여자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보잘 것 없는 물건을 파는 중년의 남자가 나누는 대화로 일관된다. 여자는 어느 부잣집에서 입주 도우미로 일하고 있고 남자는 집도 절도 없는, 매 끼니와 매일의 잠자리를 고민해야 하는 행상이다.
딱히 진행되는 이야기도 없고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지도 않고 긴 시간대를 아우르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그저 앉아서 오후부터 해질녘까지 대화를 나눈다. 한 편의 연극 같달까.
두 사람의 대화는 끊임없이 흐른다. 다소 두서없기도, 자기 얘기만 하기도 하나. 논쟁은 없다. 토론에 가깝다. 서로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반론하는가 하면 양보하고 타협한다. 정체된 이야기에서 뭔가 약동한다.
남자는 제법 삶에 만족하는 것 같다. 큰 욕심도 없고 하루를 그저 넘기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반면 여자는 목표가 분명한 편이다. 여자에게 결혼은 구원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당장의 목표다. 토요일마다 가는 댄스홀은 기회의 장소다.
영화 ≪유스(Youth, 2015)≫에서 한 인물은 삶에 대한 자세를 ‘공포’ 아니면 ‘열정’이라고 말한다.
물건을 팔기 위해 떠도는 걸 ‘여행’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두려운 걸까.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다른 시도를 하지 않는 걸 ‘공포’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딘가 있을 더 나은 삶을 원하고 추구하는 여자에겐 ‘열정’이 있는 걸까.
세상에 ‘짠!’하고 등장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부여되는 ‘삶’이라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것을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생일을 축하하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우리의 권리일까, 아니면 아등바등 애를 써야 하는 과업일까.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들 하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걸 더 좋아한다. 스스로 제 목숨을 포기하려는 사람을 보면 적극적으로 뜯어말린다. 과거, ‘자살’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나쁘고 흉악한 ‘짓’이었다. 태어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을지언정, 계속 살아간다는 건 우리에게 일종의 ‘의무’인 셈인 거다.
그렇다면 이왕 사는 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잘 사는 게 최선일 텐데,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여자와 남자가 주거니받거니 하는 말들은 결국 독자인 ‘나’를 향한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데 문제는 나도 잘 모르겠는 거다.
두 사람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는 잘 알고 있을까.
아닌 것 같다. 결론도 없이 소설을 마친 걸 보면.
“우리 다 같이 생각해 봅시다. 답은 없어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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