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사랑과 결함_예소연-리뷰

달콤한 쿠키 2025. 6. 30. 10:39

 

열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언젠가 무슨 수상작 모음집에서 작가의 단편을 읽고 반했더랬다. 그래서 첫 소설집에 거는 기대가 컸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을까.

 

전반적인 감상은 (몇 개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과연 이런 모양새의 작품들을 출판 시장에 내놓을 가치가 있는가, 였다.

일단 절반은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열 개의 작품 중 네 편은 건졌다. 나머지 여섯 편은 엉망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의견이다.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난삽하다.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이끌기보다 작가 혼자 폭주하는 느낌이 많다. 작가가 기술적인 면에서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감성으로만 쓰인 소설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소설 작업은 감성과 더불어 이성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구체적이지 않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은 읽다가 자주 막힌다. 이랬던가, 하면서 앞을 자주 확인해야 한다. 특히 인물들에 일관성이 없다. 작가 편의에 따라 인물 성격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 이런 건 습작에서나 보이는 실수인데 작가가 모르는 건지 냅다 지른다.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자기연민, 내지는 자기혐오에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폭력적이다. 그것도 의미가 있는 폭력도 아니고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형태의 행동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작가가 혹시 정서불안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 같지도 않은 의심을 했을 정도다.

 

<우리 철봉하자>는 주인공 석주의 폭주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석주는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친구도 아니고 동네 gym에서 단지 운동하다 만난 사이인 맹지의 삶을 넘겨짚고 자의로 해석하고 판단해서 사생활에 허락도 없이 개입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석주가 지금 민감한 상태인 건 예측 가능하다. 그녀는 인턴으로 일하는 회사에서 날선 검수로 위기에 몰려 있고 Ex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금전적인 피해도 입었다. ‘연애 포기자로 자인하는 석주는 피해망상에 시달려 과도하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과잉방어의 의지를 보인다. 외부 세계를 적대시하는 걸로 모자라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보이는데, 그 대상이 바로 맹지이다.

석주는 맹지의 남자친구를 쓰레기라고 매도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없다. 맹지 남친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제시된 적 없다. ‘살 뺐으면 좋겠다고 말한 맹지 남친의 말은 맥락과 어조,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

맹지의 반응만 삭제하거나, 달리 해서 본다면, 이 작품은 거의 사이코스릴러에 맞먹는다. 석주는 자신의 상처를 새롭게 사귄, 잘 알지도 못하는 맹지에게 투사하여 스스로 구원자가 되겠다는 오만을 부린다. 같이 살자며 논의도 허락도 없이 짐을 싸들고 함부로 타인의 영역에 침범하고 싫다는데도 막무가내로 환경을 바꾸려는 행동은 충분히 공포스럽다. 곧 맹지를 쥐고 흔들며 행동과 판단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석주의 폭주도 무시무시하지만 더 소름 끼치는 건 이런 폭력을 쾌활함, 유쾌함, 엉뚱함으로 포장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다.

 

이런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은 마지막 작품인 <내가 머물던 자리>에서도 등장한다.

이 작품은 교묘한 거짓말로 돈을 빌리고 잠적한 정선이 숨어 있다는 곳으로 찾아 나서는 시연의 이야기인데, 작가는 시연의 의지와 행동을 인정머리 없고 이기적인 것으로, 거짓말에 연락도 없이 마냥 기다리게 만드는, 예의도 배려도 없는 태도로 일관한 정선을 자유롭고 깨어 있는 인물로 그린다.

이런 일방적이고 기울어진 사고는 작가가 배경으로 삼은 셰어 하우스대안 가정의 대비에서도 나타나는데, 작가가 그리는 셰어 하우스는 오로지 규칙과 계약으로 유지되는 비인간적인 공간으로, ‘--으로 이뤄진 대안 가정은 관용과 사랑으로 움직이는 인간적인 정이 충만한 공간으로 그린다. 이는 대학 기숙사와 친한 친구와 자취하는 상황을 비교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비교할 대상이 전혀 아닌데도 작가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작품집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혹은 차지하도록 의도했을) 세 작품,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연작이다. ‘희조미정이라는 어릴 적 기억을 공유한 두 인물이 주인공인, 소외되고 궁지에 몰린 아이가 존재감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종의 성장기인데, 한 마디로 대략 난감, 총체적 난국이다.

주인공인 희조는 (역시나) 자기중심적이고 아전인수 격의 사고를 하는, 굉장히 이기적인 인물이다. 희조는 또한 죽음에 매혹되어 있고 그것을 동경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유희의 도구로 삼고 겁을 줄 상대를 고르고 죽어가는 할머니를 희롱할 정도로 비겁하고 잔인하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로 어설프게 엮은 외피를 뒤집어쓰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굉장히 공정한 척하면서 선택적 폭력을 휘두른다.

세 작품 내내 희조의 대척점에 있는 미정은 얄팍하기가 종잇장 같은 인물이다. 그녀의 폭력적인 성향은 딱히 원인이 없고 방향도 없다. 그냥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미치광이 망나니 같다. 인격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야기 진행 상 필요한 역할을 하는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작가가 이 세 작품을 애초부터 연작으로 만들 기획이 아니었다는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인물들에도 일관성이 없고 설정이 뒤엎어지는 경우도 있다. 작가의 쓸모에 의한, 소모적인 인물들이 편의대로 나왔다가 그냥 사라진다.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 최악이다. 작가도 작가지만 편집자의 책임도 큰 몫을 한다.

이런 요소들로 진행되는 이야기 세 편은 억지로 쓴 약을 삼키는 감상을 준다. 연민도 공감도 재미도 감동도 없다. 그냥 2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읽어내는 데 들이는 노력이 상당하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모습조차 보인다. 굉장히 무의미하고 불온해 보이기까지 한다.

 

표제작인 <사랑과 결함> 역시 불편한 감상을 남긴다.

이 작품은 급조된 느낌이 강하다.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허술한데다 산만하고 장황하다. 군더더기, 이른바 TMI가 많은 반면, 정작 필요한 장면은 안 보여준다. 오롯이 설정과 인물들의 정서적 상태를 서술하는 것으로 끝내려는 작가의 창작 태도가 안쓰럽다. 설정, 이야기들의 중요 요소가 말이 되게 하려면 그 사이에 다리를 잘 놓아줘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 다리들이 아예 없거나 사상누각이라 쉽게 허물린다.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들이 공감을 얻지 못하니 이야기가 허황되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 나쁜 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훤히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작가는 인물들을 한 단어로 정의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습작 시기의 버릇처럼 보이는데 심각하다. 그냥 착하다하고 끝낼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왜 착하다는 평판을 듣는지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뻥이다. 이조차 일관성이 없어 이 말 했다가 저 말 한다. 인물들이 무슨 종이인형도 아니고 팔랑팔랑거린다. 인물들이 잘 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다. 주인공 성혜만 해도 극적인 설정으로 과장된 게 전부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스스로에게 가학적인 모습은 앞의 희조와 닮아 있다.

 

<>은 한마디로 숨통을 틔워주는 작품이었다. 작품집 시작부터 내내 안개를 헤치고 시궁창을 뚫고 험난한 길을 걷다가 비로소 양지 바른 곳에 가닿은 느낌이랄까.

주인공인 해나는 계약직으로 어찌어찌 살아왔으나 삶에 큰 열의는 없는, 우연히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탔지만, 그 돈으로 자격이나 기술 취득에 투자하기 보다는 부동산에 운을 기대한다.

이혼한 가정의 삶에 쫓기는 엄마를 보고 자란 해나는 (마찬가지로) 자기연민에 빠져있으면서 대의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아빠를 깔보고 의심하고 거부한다. 해나는 결말 즈음에 수로에 빠지는데, 그 사고를 아빠의 탓으로 돌리고, 결국엔 아빠가 대의의 세계에서 자신을 제외시킨다고 원망한다.

앞의 작품들에서 줄곧 보인 부정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 이 작품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해나라는 인물이 결국 반면교사의 각성을 촉구하는 덕이다.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은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늑대가 주는 그것과 비슷하다. 포도가 아직 익지 않아서, 시어서 먹을 가치도 없다는, 상대를 평가절하하여 자신의 면목을 세우려는 이기심.

이 작품은 또한 형식적으로도 좋게 보인다. 경제적이고 집약적인, 잘 쓰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개와 혁명>은 나를 예소연이라는 작가에게 이끈 작품이었다. 이런저런 문학상도 많이 받고 여러 앤솔러지에 실린 작품기도 하니, 예소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이 작품 역시 작가의 특기인 엉뚱함과 쾌활함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결말이 주는 페이소스가 상당하다. 체제에 대한 대항, 관습과 전통의 전복을 노리는 이야기로서 젊은 세대의 치기가 읽힌다. 유쾌하고 도발적인 이야기로서 죽음을 소재로 장례식장을 무대로 하면서도 은은하고 암시적인 개그 코드로 달콤쌉싸름한, 고급스러운 감상이 일품이다. 우리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무엇을 쟁취하려 하는가, 하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질문도 효과적이다.

 

활짝 열려 있는 결말이 무궁한 토론 거리를 제공해 줄 <분재><도블> 역시 경제적이고 모범적인 구성을 갖춘, 무척 맛있는작품이었다. 특히 인물들 간의 관계가 모호한 반면, 그들의 역할이 부각된 <분재>는 삶에 많은 것을 걷어내고 할 일을 그저 묵묵히 내해는 것이 최선의 삶이 아닐까, ‘살아 있음의 의미는 그저 살아간다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주는 정서적 떨림이 상당했다. 불필요한 무게를 덜어냄은 이어지는 <도블>에서도 반복되는 것으로 읽힌다.

 

후반의 몇 작품을 빼면 상당히 실망한 소설집이었다.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같은 작가가 썼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소설은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다. 일말의 진실이 없다면 그냥 거짓인 거다.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기. 그게 소설을 쓰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능숙한 거짓말쟁이. 운명이 그렇다면 소설가들은 능란한 뻥쟁이가 되어야 한다. 허무맹랑한 거짓말에 독자들이 속을 리 없다. 좋은 거짓말일수록 교묘하고 기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