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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_Blancanieves_2011-리뷰

달콤한 쿠키 2014. 7. 22. 20:18

 


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 (2014)

9.3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
출연
마리벨 베르두, 마카레나 가르시아, 다니엘 지메네스 카초, 안젤라 몰리나, 인마 쿠에스타
정보
드라마 |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 104 분 | 20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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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제일 잘 나가는 투우사인 안토니오는 경기 중, 불운의 사고를 당합니다. 그의 임신 중인 아내는 그 충격으로 딸을 출산하다가 사망하고요. 후에 안토니오는 병상에서 자신을 극진하게 보살피던 간호사, 엔카르나와 결혼하지만 엔카르나는 어린 카르멘에게 좋은 계모가 되어주질 않습니다. 계모는 불구의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고, 카르멘의 목숨까지 노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공주의 스페인 판 각색입니다. 거의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지만 결과물로서의 영화는 매우 흥미로워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각색에 맞게 변형된 동화의 주요 요소들은 이 영화에 고유한 개성을 부여합니다. 원작 동화와 이 영화를 비교하는 것도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 중의 하나죠. 게다가 스페인이라는 배경, 투우와 플라맹고 춤 등의 소재 같은, 원작 동화와 이질적인 요소들도 영화 안에서 제구실을 충분히 하고요.

 

영화는 원작 동화가 가지고 있는 감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어둡고 암울하며 잔혹하고 무자비하죠. 특히 엔딩이 그런데, 동화 속의 백설공주처럼 멋진 왕자의 키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카르멘은 인간으로서의 최후의 존엄조차 무시당하고, 비인간적인 장삿속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지요.

 

동화 속의 백설공주의 가장 큰 악역은 못된 왕비였지만, 이 영화 속의 카르멘이 대적할 상대는 삶 자체입니다. 영화는 카르멘에게 시종일관 그렇듯, 관객들의 감정 역시 궁지로 내몹니다. 카르멘은 원작 동화에서처럼 수동적인 캐릭터도 아니고, 최근의 또 다른 백설공주 각색의 판타지 영화에서처럼 용감무쌍한 여전사도 아니에요. 그냥 오늘을 사는 우리들처럼 운명이 강요하는 삶을 열심히 살 뿐이죠. 카르멘은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지만 순간순간의 만족과 기쁨을 소중히 여기고 반응에 충실하며 그냥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냅니다.

 

그래서 단순히 ‘권선징악’의 교훈을 줬던 동화와는 달리, 영화의 테마는 훨씬 복잡하고 영화의 느낌처럼 냉정합니다. 못된 계모의 불행한 결말도 관객들에겐 일말의 위로도 안 되죠. 영화를 보고 있으면 카르멘이 조금만 더 용감하고 영리했더라면, 조금만 더 자신을 위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이런 생각은 거의 들지 않거든요. 카르멘은 자신의 인생을 차근차근, 한 순간 한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Carmen이라는 이름처럼) 카르마(Karma)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 모습에서 관객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어요. 카르멘은 ‘기회’와 ‘노력’이 없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불행하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비루한 세상과 남루한 삶을 그럭저럭 살아내는 것은 아마도 사랑 때문일 것이라는 교훈을 영화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엔딩에서 보이는 ‘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는 애절하지만 아름답죠. 비참한 삶 속에서도 사랑의 위안은 꼭 꽃을 피워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 거고요.

 

 

사족.

원작 동화의 설정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계모의 동기는 동화에 비해 약합니다. 동화 속의 왕비는 자기보다 더 예쁜 백설공주를 (같은 여자로서) ‘질투’했지만, 영화 속의 계모는 그냥 돈을 밝히는 나쁜 년이에요. 좀 심심하죠.

계모의 캐릭터와 연관해서 이 영화는 ‘돈이면 다 된다’는 세인들의 믿음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양심이나 영혼까지 파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죠.

 

또 사족.

흑백에 무성 영화입니다. 굳이 이런 구색을 고집한 감독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관객들의 감상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별다른 자극이 없으니 배우들의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요. 배우들 역시 대사와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표정과 동작만으로 연기를 합니다. 그런 연출을 적절한 영화 음악이 빈 곳을 메워주고요. 음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화 음악이 상당히 좋습니다. 영화 감상이 어려우시다면, 영화 음악이라도 구해서 들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