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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_An Autobiography_1977-리뷰

달콤한 쿠키 2014. 9. 25. 22:10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저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14-03-1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가 직접 쓴 자서전 국내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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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삶을 엿본다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고 영화나 연극을 즐기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타인의 삶을 기웃거린다는 것은 약간 부도덕한 행위 정도로 간주되겠지만, 발을 들이고 시선을 두며 귀를 기울이는 그 세계가 허구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위안을 삼지요. ‘간접 경험’이라는 핑계도 그럴싸하고요.

하지만 허구의 세계가 아닌 실제 누군가의 솔직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갖기 힘듭니다. 누구나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요. 특히 어떤 사건이나 업적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사람들이라면 더 그렇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이중, 삼중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게 대부분이니까요.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자서전이나 평전, 전기 등의 읽을거리가 있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 자신이 궁금했거나 한때 우러렀던 누군가의 삶을 저술한 책들이 있다면, 그 중에 한 권을 고르면 되죠.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는 본인에게 한때 우상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크리스티의 낡은 책들을 가끔 들춰보며 추억에 젖기도 하고, 그 중 아주 좋아했던 책들은 꼼꼼히 다시 읽기도 하니까요.

초등학교 때 접했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Murder of Roger Ackroyd)’이 시초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작품에 매료됐던 저는 크리스티의 소설, 더 나아가 다른 많은 작가들의 추리소설들을 찾아서 탐독했지요. 당시의 저에게 독서 습관을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추리소설들이었습니다. 특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의 공로가 가장 크지요. 글을 쓰고자 하는(보다 정확히는 이야기를 ‘짓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 것도 추리소설들이었습니다. 그 불꽃은 너무나 강렬해서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졸업 후에 다른 직종의 일을 하면서도, 나이를 먹으면서도 시들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거센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또한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본인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화려한 십대의 마지막 해, 제 삶을 통틀어 가장 우울하고 외롭고 비참한 시기를 보냈는데, 그 때에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가장 훌륭한 ‘기댈 어깨’가 되어주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현실도피로서의 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도 되지만, 그 시절을 무난히 잘 견뎌냈으니, 애거서 크리스티의 덕을 봤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죠.

 

좋아하는 작가나 감독의 책이나 영화들을 찾아서 읽고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일지,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은 어떨지, 유명한 작가나 감독이 아닌,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 누군가의 엄마나 아버지, 누군가의 조카, 누군가의 친구 등등,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지는 거죠.

저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에 대해 어떤 상(想)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상상으로 만들어낸 크리스티는 진짜 크리스티가 아니었죠. 호기심에 애거서 크리스티의 평전을 두 권 읽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았어요. 그것들은 좋은 책이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크리스티를 바라본 것일 뿐, 진짜의 작가의 모습을 만나기엔 부족했지요. 크리스티의 작품 목록에 ‘자서전’이 있다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 어느 출판사 하나 그것을 번역해 출판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인 올해(2014년) 출판한 따끈따끈한 신상인 이 책을 만났어요. 제겐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죠.

 

이 책은 저자가 1950년에 쓰기 시작해서 65년에 탈고한 글입니다. 50년엔 미스 제인 마플(Miss Jane Marple)이 등장하는 ‘예고 살인(Murder Is Announced)’이 출판된 해이고, 65년엔 역시 미스 제인 마플이 등장하는 ‘버트램 호텔에서(At Bertram's Hotel)’가 출판된 해입니다. 쓰는 데에만 장장 15년이 걸린 이 자서전은 (대부분의 자서전을 집필하는 방식이 그렇듯) 대필 작가도 없이, 작가 자신이 프롤로그에서 고백했듯이 ‘과거 아무 때이고 손을 푹 담가 한 움큼 건져 올린 기억들’을 무척 자유로운 방식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 또한 작가가 서두에서 예고한 대로) ‘자서전’이라는 무거운 명칭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다스럽고 친근감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일대기를 연대별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종횡무진 여행합니다. 그래서 번역을 거치긴 했지만, 크리스티 자신이,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의 습관처럼, 나른한 오후 한 때 티타임을 가지며 살아온 과거를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는 느낌이에요. 이 책을 읽다보면, 눈앞에 한국말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쉽게 상상됩니다. 크리스티와 그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분명 사랑하고 아끼게 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고향인 토키의 애쉬필드 저택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과 부모님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되는 크리스티의 자서전은, 그것이 탈고된 65년까지의 작가의 거의 전 생애를 다룹니다. 외부에 익히 알려진 프로페셔녈한 모습 외에, 다소 어수선하고 쾌활한 말괄량이였던 유년시절과 작가의 가족과 친척들, 사생활에 있어서는 이혼으로 끝난 첫 결혼,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고고학자 맥스와의 두 번째 결혼, 첫 번째 작품인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the Affair of the Styles)’의 집필과 출판 과정, 성장하면서 겪었던 많은 이별과 죽음, 학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교육과정, 유모와 하녀들과 요리사, 그리고 가정교사들과 충견들, 사교계 친구들 같은 소소하고 사적인 부분까지 독자들은 생생한 크리스티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생애를 통틀어 주목할 만한 작품들의 탄생 배경, 작가 스스로가 고백하는 자신의 사소한 집필 습관 등등은 크리스티의 작품에 단 한 번이라도 매혹되었던 독자들에겐 무척 재미있는 언급일 겁니다.

 

평범한 여자로서의 크리스티는 먹성 좋은 대식가였고, 개인적으로 수학과 골프, 사교댄스와 사진에 적잖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작가의 집(주택)에 대한 열정은 무척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이 책에 거론된 작가가 소유했던 집들을 거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니까요. 그웬 로빈스가 쓴 평전, ‘애거서 크리스티의 비밀(The Mystery of Agatha Christie)’에 의하면 크리스티에게 집을 사는 것은 일종의 수집 취미였다고 합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추리소설 작가라는 이력 외에 애거서 크리스티를 수식하는 말들은 무척 많습니다.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크리스티는 전문 약제사였고, 아마추어 고고학자였으며, 피아노와 작곡에도 능했습니다. 한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오페라 가수가 되길 희망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크게 좌절했다는 고백으로 미루어, ‘문학’ 외에 ‘음악’이 작가의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죠. 또한 크리스티는 수줍음이 많은 성격임에도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친구들을 만드는 것에도 진정한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작가로서의 크리스티는, 특히 ‘쥐덫(the Mousetrap)’이라는 작품으로 세계 연극사에 한 획을 긋는 극작가였으며 메리 웨스트마콧(Mary Westmacott)이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소설을 출판하기도 했었죠. 이 자서전도 그렇고 메리 웨스트마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들도 그렇고, 추리소설 쓰는 것이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든 일임을 작가는 이 책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크리스티는 시집과 여행기, 회상록, 동화 등에도 필력을 발휘했습니다.

 

공인으로서가 아닌, 한 여자, 특히 두 번의 결혼과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을 겪은 노인으로서 크리스티는 당시의 젊은이, 하지만 여전히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유효한 충고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는 자신이 살면서 가장 유용하고 필요했던 덕목으로서 ‘충직함’과 ‘용기’를 강조하며, ‘사랑’이나 ‘믿음’ 이전에 ‘희망’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긍정적이었고 삶을 사랑했으며, 인생의 불확실성을 오히려 반갑게 여기며 시간을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았던 크리스티는 자신의 삶이 ‘하루하루가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회상합니다.

 

크리스티의 남다른 범죄관이 엿보이는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태어나면서 육체적인 성(性)이 결정되듯이, 범죄자의 기질 역시 유전자를 통해 타고나는 것이라고 털어놓은 대목에서, 작가는 자신이 썼던 추리소설들을 통해 ‘범죄’가 아닌, ‘범죄자’를 고발하는 것에 평생을 바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작품 속이지만 ‘살인’이라는 범죄를 증오하며 그 ‘피해자’들에게 항상 더 마음이 쓰였다는 고백을 통해, 어떤 권리(특히 삶의 권리)를 타의에 의해 빼앗긴 약자들에 대한 동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서전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애거서 크리스티는 약간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작가가 언뜻 내비친 여성관이나 결혼관을 봐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크리스티가 살았던 시대를 감안하면 그런 관점을 갖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 있습니다. 아치볼트 크리스티 대령과의 첫 번째 결혼이 파행을 맞을 때, 당시 온 영국을 떠들썩하게 들쑤셔놓았던 작가의 실종 사건만 봐도, 남편의 변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능히 상상할 수 있지요.

 

아쉽게도 그 센세이셔널한 사건에 대해서 정작 크리스티 본인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위에서 언급한 그웬 로빈스의 평전이나 앤드류 노먼의 또 다른 평전 ‘애거서 크리스티; 완성된 초상(Agatha Christie; an Finished Portrait)’, 혹은 더스틴 호프만과 바넷사 레드그레이브 주연의 79년 영화 ‘애거서(Agatha)’를 참고하세요. 평전 두 권은 몇 년 전에 번역되어 출판된 적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는 이 자서전을 탈고한 이후로 73년의 ‘운명의 문(Postern Of Fate)’까지 7편의 장편소설을 더 완성해 냅니다. 그 외에 74년엔 초호화 캐스팅으로 ‘오리엔트 특급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이 영화화 되고, 71년엔 추리문학에 대한 공헌으로 영국 왕실로부터 데임 작위를 받죠.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성공을 거둔 희곡 ‘쥐덫’은 52년에 런던의 앰배서더즈 극장에서 초연된 이래로 오늘날까지 무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티의 사망 전 해인 74년엔, 2차 세계대전 중인 40년대에 집필했던 에르큘 포와로(Hercules Poirot)의 마지막 작품인 ‘커튼(Curtain)’이 출판되는데, 결말에 나오는 포와로의 죽음 때문에 그가 마치 실제 인물인 양, 타임즈 지(Times 紙)에 부고 기사가 실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사후엔 ‘커튼’과 함께 집필했던, 미스 마플의 마지막 사건인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죠.

 

자서전에 말미 즈음에 크리스티는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기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만 그 이후로도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작가로서의 성공은 계속 이어졌고, 그의 사후에도 그 영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성공이나 영광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인생을, 삶을, 사랑 그 자체를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리타분하게 들리겠지만 삶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작가로서 크리스티가 누리고 있는 영광은 그 숱한 업적들보다도 앞으로도 계속 열혈 독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같은 충직한 팬들을 갖는 것도 포함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