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은 기억상실증 환자입니다. 이십여 년 전에 그에게 일어났던 어떤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인데 그 증세가 특이합니다. 사고가 일어나기 이전의 기억은 있는데, 그 이후론 까마득한 거지요. 게다가 하루 동안의 기억도 잠자기 전까지만 유지될 뿐, 자고 일어나면 깡그리 사라집니다. 기억을 하는 능력보다 기억을 쌓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매일 아침, 이십여 년 동안 크리스틴은 낯모르는 곳에서 낯모르는 남자의 침대에서 잠을 깹니다. 낯모르는 곳은 바로 자신의 집이며 같은 침대에서 잔 남자는 바로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일일이, 매일 같이 설명을 해 줘야 해요. 본인도 끔찍하지만 곁에서 도와줘야 하는 식구들의 곤란도 어마어마하겠죠.
하지만 편리하게도, 크리스틴의 곁엔 남편, 벤뿐입니다. 벤으로서는 고역이겠지만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는 없어 보여요. 하지만 연로한 부모님들은 예전에 돌아가셨다 쳐도, 결혼 생활 이십 년 동안 자식도 없고 주위에 친한 친구나 이웃도 하나 없다는 게 일단 수상하죠.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틴은 남편 몰래 진료를 받고 있던 닥터 내시의 제안에 따라 쓰기 시작한 일기의 도움으로 짧게나마 과거를 서서히, 그리고 감질나게 만들어 가는데, 그 매일의 기록으로 크리스틴은 벤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의심이 마땅한 걸까요? 그렇다면 벤이 숨기고 있는 크리스틴의 과거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벤의 의도는? 크리스틴에게 일어났던 사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을 동반하는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는 이야기라는 그릇 안에서 가능성이 많습니다. 로맨스나 스릴러, 미스터리 등의 장르로서의 도구는 물론, 한때 유행이긴 했지만 이야기 예술가들에게 ‘정신분석’ 운운할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되기도 했어요.
또한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에도 좋은 장치입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가 만들어놓은 결과이므로, 그 과거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바로 ‘나’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의 행동, 과거의 사고, 과거의 선택과 결심 같은 기억과 경험들이 사라졌으니 오늘의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 모조리 없어진 셈이니까요.
크리스틴이 겪는 고난도 그것입니다. 자신은 누구며,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가치관을 갖고 여자, 혹은 딸이나 아내, 어머니로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런 기억이나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매일의 아침을 맞는다는 상상을 해 보세요.
흥미진진한 소재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약간 지루합니다. 이 소설이 ‘첫 키스만 50번째’나 ‘메멘토’ 같은 영화들을 기억나게 해서가 아니에요. 물론 이 소설과 방금 언급한 영화들엔 공통점이 많긴 하지만(주인공의 증상도 그렇고, 크리스틴은 사진을 찍는 대신 일기를 적어요) 이 소설엔 나름의 개성이 있습니다. 소설 중간에 엔진이 살짝 꺼지는 것은 ‘재활용된 소재’ 때문이 아니라, 그 소재를 다룬 작가의 솜씨가 약간 미숙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기억상실증 환자인 주인공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정서적 강렬함엔 그 한계가 있습니다. 동적인 액션보다 정적인 사고, 스스로를 향한 질문과 내적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는 설정의 특성 상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크리스틴의 심리 묘사는 지극히 평범한 편입니다. 그래서 소재 이상으로 어떤 메시지나 모종의 통찰을 전달하는 것엔 부족함이 많죠. 게다가 소설의 절반 이상이 크리스틴이 적는 일기의 내용인데, 작품 내내 크리스틴의 고통과 절망에 집중하느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만 반복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반적으로 화음이 없는 돌림노래를 듣는 기분입니다. 아무리 듣기 좋은 멜로디라도 변화 없이 반복되다보면, 듣는 사람들을 지겹게 만들죠.
게다가 디테일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더러 눈에 띕니다. 예를 들어, 닥터 내시의 전화를 벤이 받았을 때, 어떻게 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아내에게 전화 올 곳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크리스틴이 자신이 과거에 소설을 한 편 발표했던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까. 기타 등등.
하지만 대체적으로, 작품 전체의 긴장감은 꽤 좋은 편입니다. 독자들은 크리스틴의 일기를 통해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의 입장에서 현재와 과거의 유일한 매개는 남편인 벤밖엔 없죠. 무아(無我)의 현실과 간간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조각난 과거를 이어주는 매개 또한 벤입니다. 하지만 가장 의지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벤에 대한 불신이 점차 커져가면서 이야기의 서스펜스는 서서히 증가합니다. 크리스틴이 자신의 과거를 캐가는 과정도 미스터리 분위기로 잘 다듬어졌고요. 크리스틴이 닥터 내시에게 느끼는 감정 같은 복선들도 교묘하게 잘 깔려있습니다.
저자인 S. J. Watson은 (우리의 예를 들자면) 문화 센터 같은 곳에서 6개월의 글쓰기 과정을 통해 이 장편을 완성해냈다고 합니다. 당연히 작가의 데뷔작이고요. 그리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니콜 키드먼과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등의 배우들을 동원하여 만든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했다고(우리나라는 곧 한다고) 하니, 처녀작으로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셈이죠.
마지막 불평.
‘번역’이 아닌, 단순한 ‘해석’ 수준의 문장들이 많이 거슬립니다. 무슨 번역기를 돌린 것도 아니고, 오역보다 더 심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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