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단편들이 실린 백가흠의 이 소설집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자전적인 작품, 혹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듯한 작품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백가흠의 다른 작품집들 중에서도 보다 사적인 경향이 강한 결과물로 보는 편입니다. 독자들마다 감상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제 생각은 그래요.
남들의 하소연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죠. 전 그런 소리를 별로 듣기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의 넋두리는 흥미 있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집을 제가 두 번을 읽은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고요.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는 제목 그대로 ‘소문’, 그것의 괴물 같은 생명력과 영향력을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소문의 발원이나 그 진위가 아닌, 스스로 덩치를 불리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소문 그 자체입니다. ‘소문’은 사람들의 잔인한 호기심을 먹고 삽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호기심이란 잔인해서 부정적인 정보에 더 많은 관심이 가기 마련이죠. 그런 습성의 소문은 사람들의 관심을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이고 그것에 휘둘리게 만들고, 사람들은 그 영향력 아래 있도록 스스로를 방치하며 그럼으로 또 다른 현실이 잉태됩니다. 그 결과로서 이 작품의 결말은 황 약사의 ‘자살’입니다.
며느리가 실종된 황 약사의 가족과 연민을 가졌던 탈북민이 사라진 농장주 김씨의 주변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이 작품은 묘한 결말을 이끌어냅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황 약사에 비해, 김씨에게는 비교적 일말의 희망을 안겨주죠. 이는 작가의 편견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약자인 김씨에 대한 작가의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근원> 역시 첫 작품의 구성을 따라갑니다. 죽어가는 모친을 찾아가는 근원과 그가 살아온 과거를 교차해서 보여주는 이 작품은 끝까지 그 성실함을 놓지 않는 주인공과 휴머니즘 넘치는 엔딩이 인상적입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근원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주목해 봤습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지만, 근원은 아마도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그 존재감이 항상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그 진실함으로 더욱 눈에 띄는 남자가 아니었을까요. 그 예로, 근원을 이끈 불빛은 벚꽃에 반사된 달빛이 아니라 죽은 노파의 혼불이었고 근원이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노파도 알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집의 첫 작품인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와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매장’, 혹은 ‘무덤’이란 소재가 등장하는데,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에서는 매장(정확히는 수장)되었던 시체가 드러남으로 다른 소문, 혹은 다른 사건의 시작을 말미암았다면, 이 작품 <그런, 근원>에서의 매장은 이야기와 감정을 마무리하며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봉인하고 과거로 남겨두는 의미에서의 매장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근원의 삶은 끝이 아닙니다. 매장된 노파, 일면식도 일절 없었던 노파의 무덤(과거)을 뒤로 하고, 아마도 엄마를 만나기 위한 발걸음(미래)를 재촉했겠지요. 이 작품이 결말에서 던지는 암시는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에서 반복됩니다.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의 주인공은 외소한 몸집의 정수기 외판원입니다. 외모로 인한 열등감과 차별을 경험하는 사람이죠. 작품은 이 사람의 하루 동안의 삶과 그의 주변을 별다른 자극 없이 담담하게 펼쳐 보여주는데, 그 감상이 사뭇 서글픕니다.
주인공의 퇴근길이 기억에 남습니다. 혼잡한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삶을 뚫고 나오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삶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뚫고 나오듯이 기어코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버스를 벗어난 남자가 갈 곳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빈 집이듯이 우리도 결국 공(空)을 향해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낯모르는 타인의 육체와 부대끼면서, 작은 키에 손잡이에 매달리지도 못하고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타인의 몸에 엉키고 기대면서도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주 소박한 만족이 삶과 세상과 우주에 대해 의외의 감사를 느끼게 해주는 것 처럼요.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독해져야 한다’는 주인공의 각오는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작가의 조언처럼 들립니다.
결국 딸을 위해 직접 ‘파워레인저’가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은 거울 속에서 자신이 아닌 낙타를 봅니다. 작품 속 작가의 표현대로 고독하면서 의연한 동물인 낙타는 낯설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동물이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주인공의 미래는 근원의 미래와 어딘지 닮아 보입니다.
<통(痛)>과 <쁘이거나 쯔이거나>는 이 소설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입니다. 시의적인 소재와 비극적인 결말로 깊은 인상을 남기죠.
<통(痛)>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하루하루를 끔찍하게 연명하고 있는 노인을 통해 전쟁의 폐해를 고발하려는 피상적인 의도 외에도, 타고난 희생양으로서의 가혹한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 권력의 알량함,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그에 따르는 폭력에 대한 고찰의 기회를 주는 작품입니다.
<쁘이거나 쯔이거나>는 다문화 정책의 이면을 적나라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입니다. 해괴하고 무섭고 끔찍하고 잔인하며 불쾌한, 읽는 내내 이건 작가의 상상이야, 하는 주문을 잊지 말아야 했던, 그러면서도 과연 이게 상상일까, 하는 의심에 시달려야 했던 작품이죠. 때때로 가장 비인간적이고 상식 밖의,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고 있어서도 안 되는 생각이나 일들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동조와 지지를 얻고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봐왔습니다. 그 원인에 관한 분석이나 고민이 일절 생략된 이 작품은 오직 그 과정과 결말을 향해 돌진합니다. 힘이 넘치고 아름다운 반면 과격하고 잔인한 이 작품은 타인을 비인간화시킴으로서 악(惡)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과 그것에 동조하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와 <힌트는 도련님>, 작품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P>는 글 쓰고 이야기를 짓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 자신을 위한, 소설가로서의 고뇌와 행복을 허심탄회하게, 혹은 우회적으로 드러낸 작품들로 읽혀요.
<그래서>의 주인공은 전직 평론가였던 노인인데, 사실은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지박령이죠. 이 귀신은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지 않으며 하릴없이 온종일을 책을 읽으며 소일하며 이웃집을 기웃거리고, 빨간 장갑을 낀 의문의 여자의 느닷없는 방문에 시달리기도 하다가, 어느 날 밤, 어떤 남자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 남자 역시 죽은 자의 망령으로 먼 과거로부터 소환된 그 귀신은 노인으로 하여금 상처와 파멸로 이어지는 어떤 기억을 이끌어냅니다.
이 작품은 글을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의 상호성, 그 행위들을 의무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외로움, 업보와도 같은 그들의 직업과 자진해서 받아들인 운명의 가차없음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입니다. 공간에 갇혀 그곳을 떠나지도 못하는 지박령의 모습은 ‘글’과 ‘문자’에 갇혀 사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작가의 자기고백 같은 작품인 표제작, <힌트는 도련님>은 현실과 허구가 한데 뒤섞여 진행하는데, 이런 구성은 작가의 특기처럼 보입니다.
「소설은 충족이나 낭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결핍이나 불합리에서 출발한다는, 이런 부조리에 대한 욕망을 다루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행한 일(본문, 115쪽)」이라는 작가의 고백은 앞서의 <그래서>에서 들린 작가의 목소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요. 이런 글쟁이로서의 고민과 고통은 마지막 작품인 소설가의 이야기인 <P>에서도 약간 변주된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자신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에 두려움이 있는 작가, ‘P'는 아픈 기억과 과거를 왜곡시키고 작가로서의 시선을 자신에게로가 아닌 외부에 두려 합니다. 하지만 집필은 원활하지 않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충고를 마다하죠. 무릇 작가란 자신의 몸을 빌려 타인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아닌, 타인의 몸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 일련의 작품들은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혹은 글을 쓰고 있거나 쓰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충고나 위안, 혹은 자기 암시 같은 성격이 강합니다. 백가흠은 아무래도 자신의 이야기에 목이 무척 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힘들고 고된 일입니다. 혼자 쓰고 혼자 보는 일기나 개인적인 기록도 그러한데, 이처럼 대중들에게 읽힐 것을 전제로 한, 출판을 목적으로 한 글들은 더욱 그렇겠죠. 결과는 같겠지만, 만약 그 목적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면, 작가는 왜 ‘작가’에 관한 글들을 쓰고 싶었을까요. 이런 의문에서 아직 살아 있는 고민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왜, 어떻게’의 질문을 여전히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아직 깨어 있는 작가 백가흠과의 만남은 이 작품집이 흥미로운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작가 백가흠이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백가흠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상상하건대, <그런 근원>과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 같은 작품에서 인간 백가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타인과 그들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는 분명 관찰자의 흔적이, 그 잔해일지라도 투영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통>과 <쁘이거나 쯔이거나> 같은 작품들의 편을 들어주어야겠습니다. 제가 경험하고 기대하는 백가흠의 글들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 역시 취향의 문제겠지요.
이 책의 정보는 아래로...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BOK00013673487LI
사족
카카오다음에서 블로그의 정보첨부 기능을 지원하지 않네요.
저처럼 책이나 영화의 리뷰를 쓰기 위해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좀 불편하겠어요.
책이나 영화 정보로 연계할 수 있어서 참 편했는데...
갑자기 서비스를 중단하게 된 이유도 석연치 않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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