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노년(혹은 중년)의 ‘스스무’가 열네 살이었던 지난 52년의 여름방학을 당시에 썼던 일기를 계기로 회상하는 부분과 그런 스스무가 알지 못하는, 더 오래된 과거의 부모 세대들의 이야기가 교대로 진행됩니다. 중편 정도의 짧은 분량에 비교적 쉬운 소재로 술술 잘 읽힙니다. 이야기도 재미있는 편이고요. 하지만 밀도는 약간 떨어집니다.
역자는 이 작품을 추리소설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건 약간 실수처럼 보입니다. 누군가 죽긴 죽는데 작품 절반을 읽고 난 후에야 시체가 나오고 추리의 여지는커녕 의심스러운 인물조차 나오지 않으니까요. ‘누구지?’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대목이 있긴 있는데, 추리소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스스무가 회상하는 부분은 십대 아이들의 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아빠 친구의 초대로 여름방학을 보내러 간 곳에서 또래 친구도 만나고 동갑의 여자아이에게 사랑이란 감정도 느껴보고…… 짧은 방학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낸 아이들의 이야기엔 그들의 서로에 대한 호감과 설렘, 귀여운 질투와 그들 특유의 솔직하고 천진한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어 공감하며 따라가기가 쉽죠.
어른들의 과거 이야기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인 ‘쿠라사와’ 가(家)를 배경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들, 그리고 비밀의 여인이 엮어내는 이야기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이 얽혀 있어 우울한 정서가 독특하죠.
그런데 문제는 두 이야기들이 한 작품 안에서 잘 섞여 있지 않다는 겁니다. 두 개의 이야기는 각각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고 어른들의 과거가 현재의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현재의 아이들이 과거에서 시작된 과오를 바로잡는 기회를 갖는 것도 아니고요. 어린 스스무와 그 친구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위한 들러리처럼 보입니다. 낭비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플롯이 아까워요.
게다가 4장과 6장에 국한되어 제시되는 미스터리는 오직 ‘책’이라는 매체에서만 유효한 것이라, 시각이 동원되는 (TV나 영화 같은) 매체라면 방법을 달리해야 하죠. 이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되지 않는 이상 그런 점이 문제가 될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두 개의 장에서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독자들의 편견을 이용해 뒷통수를 치겠다, 이게 바로 작가가 마련한 노림수인데 드러난 결말이 ‘순수하게 충격적인(의외의) 엔딩’이 되기 위해서는 지극히 정정당당했어야 했죠. 지금은 그냥 ‘요건 몰랐지?’ 하는 ‘반전’만 있을 뿐인데, 그것이 흔히 하는 말로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 이야기와 융화되질 못하고 따로 놉니다.
정말 이 소설이 추리소설 이전에 좋은 소설이 되길 원한다면 독자들에게 충분한 복선(혹은 단서)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예로 ‘마치코’라고 불리는 사람에 대해서 소설은 아예 입을 닫고 있어요. 너무 직접적인 단서라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불평할 것이 있다면 소재로서 ‘동성애’를 다룬 작가의 방식입니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우울한 정서가 페이소스를 동반하는 진정한 감동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죠. 작품 속의 동성애는 그저 플롯을 짜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항상 진지하거나 무거워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한때 서로 사랑했다던 두 사람의 감정이 대체 어떤지 독자로서 감이 오질 않는다는 건 문제가 되죠. 그 감정은 얄팍하기 짝이 없어요. 종잇장 처럼요. 덕분에 아이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캐릭터들은 그들의 특징만 살아있어요. 전형적인 캐리커처 인물들이죠. 인간적인 매력이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냥 범죄가 등장하는 ‘읽을거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아주 형편없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전 아주 재미있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죠.
이 작품에서 가장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독자들의 사고(思考)의 맹점(盲點)을 이용한 작가의 방식입니다. 독자들을 잘못된 판단으로 이끄는 방법 말이에요. ‘분명히 이 얘기였잖아?’ 하는 불평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언제 그랬어? 니들이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그 말이 치사한 변명 같지 않은 이유는 작가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오류가 분명한 판단을 내린 건 독자들 자신들이기 때문이죠. 엔딩에 이르러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고 역자는 후기에서 밝히고 있는데, 그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어요.
궁금하신 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실컷 불평을 했지만 좋은 소설임엔 틀림없어요. 이 책 역시 서점을 하릴없이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요란한 선전을 동원한 미심쩍은 베스트셀러보다야 훨씬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이 책을 읽는 반나절 동안은 다른 세상을 살았으니, 책 한 권에 바랐던 것은 충분히 얻은 셈이죠.
작가인 ‘타지마 토시유키’를 처음 접한 작품이었습니다. 검색해 보니 자국에서의 유명세와는 달리, 국내에 번역된 작품은 이 소설이 유일하네요. 다른 작품들이 있다면 더 읽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이 책의 정보는 아래로...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2583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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