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자메이카 여인숙_대프니 뒤 모리에-리뷰

달콤한 쿠키 2015. 12. 24. 21:08

 

갓 스물을 넘긴 ‘메리’는 함께 살던 어머니가 죽자, 그 유언대로 자메이카 여인숙을 경영하는 ‘페이션스’ 이모 내외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 험난한 여정이 예고하는 대로 이모와 이모부에게 제 몸을 위탁하려는 메리의 앞날은 순탄치 않습니다. 명랑하고 아름다웠던 이모는 어느새 초췌한 몰골에 불안에 떠는 눈동자를 한 중년부인이 되어 있었고, 처음 만나는 이모부 ‘조스’는 의뭉스러운 남자인데다 부부가 경영한다는 자메이카 여인숙은 범죄 집단의 소굴이었으니까요. 그것보다 더 나쁜 건 이모를 안전하게 모시고 그곳을 벗어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메리가 조스 이모부의 동생인 ‘젬’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고 가장 나쁜 건 그 역시 말 도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메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로 유명한 <레베카 (Rebecca, 40년 作)>나 <새 (the Birds, 63년 作)>의 원작자인 ‘대프니 뒤 모리에(Daphne Du Maurier)’가 36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고딕적인 배경에 로맨스와 모험 소설의 요소들을 적절히 배합한 수작입니다. 이 소설 역시 히치콕에 의해 39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각색을 거친 히치콕의 영화는 캐릭터와 모티프, 주요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원작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뒤 모리에가 히치콕의 영화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던 거죠. 영화는 다음에 다룰 기회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이 년 후에 발표한 <레베카 (Rebecca)>와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고립된 (혹은 갇힌) 여주인공,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운 남자 인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로맨틱한 감정들, 이야기 저변에 흐르는 삭막하고 어둑한 정서, 그리고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한 공간.

소설, 레베카에서 ‘맨델레이 저택’이 그랬던 것처럼 이 소설의 ‘자메이카 여인숙’ 역시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역자가 후기에서 언급하듯이 공간을 묘사하는 뒤 모리에의 능력은 감탄스럽습니다. 자메이카 여인숙 뿐 아니라 그 건물이 서 있는 황무지, 그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구석구석의 배경은 작가의 펜 끝을 거치며 마치 사진을 보여주듯이 독자들에게 생생한 경험을 전달합니다.

이런 감상에서 짐작하듯,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뒤 모리에의 장기인 고딕 소설로서의 면모입니다. <레베카>에서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작가가 묘사하는 자메이카 여인숙은 고딕적인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요. 잠긴 방, 삐걱대는 계단과 마루, 그리고 집안 곳곳에 드리워진 어둠.

작가는 맨델레이 저택을 불에 태움으로서 주인공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면 이 작품에서의 여인숙 건물은 그보다는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극 중 인물인 ‘바셋’이 작품 말미에 장담한 대로, 범죄 집단의 소굴로 전락했던 신세를 벗어나 자메이카 여인숙은 진짜로 그럴듯한 숙박업소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니까요. (자메이카 여인숙은 실존하는 장소라고 합니다. 뒤 모리에가 그곳을 우연히 방문한 후 이 소설의 플롯을 구상했다고 해요.)

 

모험소설로서 이 작품은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메리의 모험은 이야기가 진행할수록 그 수위를 점점 더 높여가죠. 심리적인 폭력 외에도 메리는 보다 직접적인, 육체적이고 무자비한 폭력도 견뎌내야 합니다.

또한 작품은 꽤 적절한 반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메리와 페이션스 이모가 결국엔 안전해질지, 악당인 조스 이모부 일당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될지 궁금해 하던 독자들은 이야기가 서서히 클라이맥스에 가까워지면서 조스 멀린의 배후에 혹시 다른 인물이, 즉 진짜 악당이 있지는 않을지 의문을 품게 되죠. 그 안개 속의 인물은 거의 결말까지 그 정체가 숨겨져 있지만 독자들로서 그것을 예측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가장 범인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는 미스터리 장르의 클리셰를 상기한다면 말이죠.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미스터리 장르에 한쪽 발을 살짝 걸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죠.

 

이 작품을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초기에 발표했던 <비밀 결사(Secret Adversary, 22년 作)>나 <침니즈 저택의 비밀(the Secret of the Chimneys, 29년 作)>,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Seven Dials Mystery, 29년 作)>, 혹은 훨씬 이후에 발표된 <그들은 바그다드에 왔다(They Came to Baghdad, 51년 作)>같은 많은 모험소설들과 비교하면, 같은 여자작가이면서도 서로 다른 작풍을 발견할 수 있죠. 크리스티의 모험소설들이 비교적 유순하고 아기자기한 멜로드라마의 분위기에 희망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것과는 달리, 뒤 모리에의 이 소설은 그 결말조차 암울합니다. 비록 메리는 위험에서 벗어나고 사랑을 발견하지만 그 앞날이 행복할지는 둘째 치고, 과연 안전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비극’을 대하는 관점으로 접하는 것도 감상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힘들게나마, 가까스로 유머 감각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죠.

 

(엄살이 아니라) 작품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읽을 수 있는 부분은 메리와 젬이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로맨틱한 감정과 유머가 가장 잘 살아 있으며 독자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작가의 배려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들이기도 하죠. 주거니 받거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오늘날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즐겨 쓰는 화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메리의 대사는 톡, 쏘는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죠.

 

주인공인 메리는 모험소설의 여주인공으로서 적격인 캐릭터입니다. 반항적인 기질에 호기심도 많고 정의로움과 의협심이 넘치죠. 무엇보다 용감하고 씩씩합니다. 주인공의 성격치고는 단조롭고 편리하게 설계됐지만 작가는 그 캐릭터성이 빠지기 쉬운 함정들을 재치 있는 대사와 주인공에게 닥치는 예상치 못한 위험, 그것에 마주했을 때의 용기 있는 행동, 과감한 결단력과 나약한 감상에 빠지지 않으려는 차가운 이성으로 메리를 무척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만들어냅니다.

이런 메리 외에,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페이션스 이모였습니다. 특이하달까, 저는 이 인물의 심리적 동기가 무척 궁금했는데, 악당의 아내로서, 결혼의 실패를 겪은 비운의 여주인공으로서, 그리고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꿈에 평생을 매달린 몽상가로서 이 인물이 겪는 비극적인 인생과 그 결말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아마도 소설 속 캐릭터의 정신분석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남자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벗어날 의지도 없이 그만 주저앉아 현실에 안주해버린, 심지어 악당을 변호하고 두둔하려고만 하는 페이션스라는 인물에게서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단어를 유추해 내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나 소위 ‘잘 나가는’ 작가들에게만 열려 있던 우리의 해외 문학 번역 시장에 대프니 뒤 모리에란 이름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반갑고 독자로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특히 출판사 한 곳에서 뒤 모리에의 소설들을 무려 세 작품이나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죠. 대프니 뒤 모리에란 작가는 (본국인 영국이나 해외에서의 명성은 예외로 치고) 그 동안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거의 무명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작가의 대표작인 <레베카> 같은 작품들은 과거에 다른 출판사에서 내놓은 적은 있었지만, 이 작품이나 유수의 단편들은 소개된 적이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죠. 몇 년 전에 <생각의 나무>라는 출판사에서 ‘기담 총서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냈던 문고 리스트에 뒤 모리에의 이름이 보였지만, 이마저도 출판사의 파산으로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뒤 모리에란 작가가 아직은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작가라는 사실은 거의 틀림이 없죠. 그런 점에서 현대문학이란 출판사의 용기 있는 행동은 우리의 출판 시장과 독자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에 내놓는 쪽이나 소비하는 쪽이나, 작금의 상황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 강요당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우리가 읽고 싶은 해외의 문학들을 마음껏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 상황 아래서 가능하다고 생각되는데, 독자들이 모두 각국의 언어에 능통해서 원서를 읽는 것에 자유롭거나, 아니면 직접 출판사를 차리거나, 둘 중의 하나죠.

우스개처럼 들리지만 진지한 발언입니다. 이런 형편에 현대문학이 보이는 행보는 단연 돋보이죠. 출판사도 책을 팔아야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터인데, 그런 입장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게 지면을 할애하기란 보통의 용기나 사명감으로 될 일이 아니니까요. 이 소설의 감상을 떠나, 귀동냥으로 제목이나 주워듣던 이런 작품을 읽게 해준 출판사, 현대문학의 용기 있는 기획에 독자로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책을 읽는 기쁨 외에 이런 별도의 보람을 가져간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험입니다. 책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만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을 기웃거려야하는 핑계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왕 내놓는 김에, 대프니 뒤 모리에의 전집을 기대해 봅니다. 뒤 모리에가 발표한 장편만 15편, 단편집도 네 권 정도이니, 스무 편 남짓의 전집을 기획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나의 사촌, 레이첼(My Cousin Rachel)>이나 <프렌치맨 크릭(the Frenchmen Creek)>, <희생양(Scapegoat)> 같은 작품들은 영화나 TV 시리즈로도 만들어졌으니, 어느 정도 시장성도 있는 것 같고요. 물론 제 욕심이죠.

 

이 책의 정보는 아래로...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2757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