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에 대한 근육을 키워가면서 잃어가는 게 있다면, 어렸을 땐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거, 그래서 아쉽고 안타깝고 서글픈 게 있다면, 바로 ‘순수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수(純粹)’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몇 개의 의미가 나오는데, 그중 상위의 두 가지 풀이는 이렇습니다.
1. 대상 그 자체에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이 없음
2. 마음속에 사사로운 욕심이나 불순한 생각이 없음 (출처; 다음 국어사전)
어른이 되면서 ‘타협’을 배우고 그것에 마음과 가치관을 깎아 맞춰가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원칙보다는 요령을 먼저 익히고 융통성이란 미명 하에 편법을 배우고, 아무런 의심이나 반성도 없이 거의 악습에 가까운 관습을 따르며 ‘아닌 것’을 아니라고 입이라도 열 용기를 잃어가는 건, 분명 이 ‘순수함’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2018년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인 ‘이혁진’의 《누운 배》는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정확히는 순수함을 잃은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과 잃은 순수함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순수함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죠. 조선소를 무대로, 어느 날 배가 한 척 넘어지는 사건으로 포문을 여는 이 작품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뉩니다. 한쪽의 사람들은 타성에 젖어 있고 관습에 충실하며 진정한 목적도 의미 있는 반성도 없이 keep going을 외치며 당장의 사적인 안위만 바라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욕구입니다. 그들은 곪아 터져 피고름을 질질 흘리는 상처를 얇은 응급밴드 한 장으로 덮는 걸로 만족합니다.
그 반대편엔 권력에 편승하기보다 관습을 깨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멈출 줄을 알고 과거를 반성함으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미래를 현재와 다른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바꾸려 합니다. 자신보다는 집단을 고려하되 그 낱낱의 구성원을 인식하고 눈앞의 이익보다 미래의 번영을 더 중요시합니다. 이들은 상처의 원인을 찾고 응급밴드가 필요 없을 때까지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려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의지는 쉽게 꺾이고 모든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갑니다. 싸움에 진 개가 짖지 않듯이 이들은 입을 다물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슬픈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들의 남은 선택지는 둘입니다. 저들 편에 붙던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어느 선택도 실패이고 패배인 건 마찬가지이지만요.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 같습니다. 시시포스의 신화를 생각나게 하고요.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말은 위로도 안 되고 해결 방법도 아닙니다. ‘더러워서 참는다’는 말 역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저들 틈에 끼겠다는 의지를 비교적 자존심 덜 상하게 포장한 것뿐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양새로 돌아가는 세상을 보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합니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게 더 편합니다. 한편으로는, 욕 하면서 배운다고 부지불식간에 저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라고, 자신이 세상을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이제야 ‘세상에 대한 근육’이 붙기 시작한 거라고 합리화를 합니다.
작가는 세상의 이런 모습을 적극적으로 알리려 합니다. 하지만 몸에 붙은 사회에 대한 관성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은 제시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현실을 고발하며 독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을 뿐, 그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작가의 모습은 결말에서 보이는 화자의 태도에서도 보입니다.
화자인 ‘문 기사’는 삼 년 남짓 몸 담았던 조선소에서 ‘별 꼴’을 다 봅니다. 이런 사람도 겪고 저런 사람도 겪고, 어떤 사건들은 간접적으로, 또 어떤 사건들은 직접적으로 문 기사에게 영향을 줍니다.
결국 화자가 선택한 결말은 그곳으로부터 떠나는 겁니다.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이 보고 듣고 겪고 깨달은 바를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리기 위해. 소극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인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어쩐지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화자는 결국 패배한 걸까요.
애당초 부질없는 싸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상대는 구체적인 게 아니었으니까요. 거대하고 단단한, 하지만 만질 수도 없는, 느끼고 알고 있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것.
커다란 모순, 오류가 난 시스템, 관성에 의해 제 몸을 불린 거대한 악(惡).
그걸 누가 모르나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 모양 그 꼴로 돌아가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답니까.
그래서 이야기는 공허한 울부짖음으로 들립니다.
(좋은 비교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사회 비판과 비참한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쓰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비교하면 이 작품의 아쉬운 점이 잘 보입니다.
조세희의 작품엔 희망과 위로가 있었습니다. 작가는 ‘저들’에게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처럼’이란 낮은 시각이 존재했습니다. 작가는 ‘연대’를 방법으로 제안했습니다. 조세희의 작품엔 암담한 한편으로, 별똥별의 꼬리처럼 미약하지만 빛나는 위안이 존재했습니다.
이 작품엔 암담함만이 존재합니다. 암담함 역시 감동의 일종이고 이런 여운을 부러 노리는 작품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허무주의적인 결말’과 ‘허무한 결말’은 서로 다릅니다. 독자들이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물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자신이 제시한 문제에 반드시 해답을 제시할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필요는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 문제에 대해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 생각이 옳은지 틀린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게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작가의 목소리는 작품을 쓰게 된 동기, 의도이기도 합니다. 그저 고발을 위해서라면 그리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 작품의 정갈한 문장, 적확한 단어들을 제거하고 나면 남는 건 거의 없어 보입니다. 결국 남는 건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까’입니다. 과연 어떤 게 작가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어떤 절실함이 있었을까. 분노? 회의? 절망? 그리고 그 이후엔?
‘누운 배’가 상징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세워야 할 무엇? 아니면 덮고 넘어가야 할 무엇? 모호합니다. 중의적이라고 해도 의미가 너무 대척됩니다. 그저 ‘맥거핀’으로 봐야 할지도 의문입니다. 후반부에서 누운 배를 일으키는 과정이 꽤 자세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자기 작품에 대한 인식이 모호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듭니다.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에도 그런 의심을 했습니다. 그 많은 부장과 과장, 대리들. 몇 명의 인물들을 빼면 명확한 캐릭터도 역할도 없습니다. 그냥 ‘그들’이고 ‘저들’로 뭉뚱그려 독자들 앞에 나열됩니다. 읽으면서 메모를 해놓지 않는 이상 어디 다시 등장해도 헷갈립니다. 캐릭터와 역할이 탈색된 인물들은 그냥 이쪽 아니면 저쪽입니다.
작가 역시 ‘저들’을 각각의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취급합니다. 이런 비인간화, 탈개성을 통해 저들은 내가 아닌 타자가 되고 화자(독자)와의 사이엔 깊은 골이 생깁니다. 작품 속에서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일어난 일들은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면서 누구에게 일어난 일도 아니게 되어 버립니다.
이런 거리감은 작품의 긴장감에 영향을 줍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위기감이나 절실함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데면데면해지는 거죠. 작품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건 이야기 속의 중대한 사안이 어떤 개인의 삶에 별로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이야기 속의 중대한 사안을 한 개인의 삶으로 끌어들여왔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 기사는 작품의 화자이면서 관찰자, ‘듣는 벽(listening wall)’입니다. 독자는 이 사람의 눈과 귀, 머리를 통해 주변을 바라보고 인식합니다. 하지만 문 기사의 역할은 상황을 관찰하고 전달만 하면 될 뿐, 주변 상황이 이 사람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도, 이 사람 역시 주변에서 돌아가는 일에 깊숙이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무력한데다 독자가 감정이입할 여지가 거의 없는 거죠.
오히려 ‘황 사장’을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감상은 아닐 겁니다. 작가의 의중, 하고 싶은 말, 혹은 문제의식 같은 건 모두 이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됩니다. 이 사람은 의지가 있고 상황을 반전시킬 능력과 기회가 있는 사람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합니다. 단지 금세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지만 이 사람의 ‘오라’와 흡인력은 상당합니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등퇴장이었고, 힘이 넘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지루합니다. 개인적으로 책장이 팔랑팔랑 잘 넘어가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소위 ‘개취’나 소재의 특이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려다가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경매 미스터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딕 프랜시스’의 작품들이나 ‘곤도 후미에’의 《새크리파이스》를 읽어보면, 경마나 로드 레이스라는 경기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어도 그 작품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마이클 크라이튼’의 과학 스릴러나 ‘로빈 쿡’의 메디컬 스릴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작가의 요령에 달린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 경험에 의지한 현실성과 핍진성, 작품 전체에 남성적인 힘이 느껴지면서도 섬세한 내면 묘사는 칭찬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점들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사족이지만, 철저히 문 기사의 관점을 취하고 있으면서 앞 부분에, 화자가 출석할 수 없는 임원 회의의 내용이나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간부들의 머릿속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작가에게 묻고 싶지만, 물론, 기회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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