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아몬드_손원평-리뷰

달콤한 쿠키 2020. 1. 15. 08:06


주인공이자 화자인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감정을 관할하는 뇌의 편도체에 선천적인 이상을 갖고 태어났는데, 전문적인 용어로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라 한다고 합니다. 사전에 의한 우리 식 표현은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합니다.

아이의 결함은 선천적인 것에 반해 그로 인해 아이가 갖는 불행은 후천적입니다. 사실, 아이는 자신의 결함에 대해 불편함을 잘 모르고 있어요. 대개는 엄마의 영향인데, 엄마는 아들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기를 바라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괴이함을 설명하고 교육하며 아닌 척하기를 종용합니다. 상대방의 얼굴 표정이 이러면 슬픈 거니, 그럴 땐 이렇게 반응해야 한다, 이런 식이죠. 이렇게 말하자니, 엄마가 아들에게 무턱대고 강요만 하는 나쁜 엄마처럼 들리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엄마는 윤재를 사랑하고 세상에 튀지 않고 스며들어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요령을 익히길 바랄 뿐이죠. 주로 사이코패스범죄자의 주된 특징을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들고 있는데, 윤재가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엄마의 노력 덕분으로 보입니다.

 

그런 윤재에게 엄청난 불행이 닥칩니다. 열여섯 생일인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외출했던 할머니와 엄마가 괴한에게 공격을 당합니다. 할머니는 목숨을 잃고 엄마는 살아남지만 식물인간이 됩니다. 졸지에 고아가 되다시피 한 선재는 슬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해 주변의 눈총과 의심을 받습니다.

 

홀로 남은 윤재는 심박사라는 남자의 도움을 받으며 엄마의 헌책방을 운영하며 지내다가 어떤 남자로부터, 죽어가는 아내 앞에서 예전에 잃어버린 아들 행세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말을 들어줍니다. 그러다 부부의 아들인 이수(곤이)’(하필 그때) 나타나고 윤재와 곤이는 고등학교에서 급우로 조우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대강 이렇게 흘러갑니다. 이후의 이야기를 대강 적자면, 윤재는 비밀이 들통 나고, 친구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다가 곤이의 미움까지 사게 되어 티격태격하던 둘은 어느새 친해지고, ‘도라라는 여자 학생이 등장하고 윤재의 마음에 사랑이 싹트는가 싶더니, 곤경에 빠진 곤이가 다 때려쳐이런 식으로 막장으로 치닫자 윤재가 그를 도우러 가고.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서사입니다. ‘알렉시티미아라는 소재와 그것을 다룬 방법은 새롭다 (너그럽게) 여길 수 있지만, 그것을 제거하고 본다면 익숙하다 못해 뻔한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결점이 있는 주인공이 주변의 등쌀에 괴로워하다가 숙적을 만나고, 두 아이의 대결 구도가 화해 모드로 진입하면서 두 아이가 성장하며 엔딩.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들은 수도 없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말이죠. 그러니 굳이 청소년 소설이란 외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그들에 천착한, 그들만의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실컷 해 온 이야기를 반복하는 걸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할 수 있고 플롯의 정형성도 분명히 존재하는 바, 이야기의 반복이나 플롯의 재활용은 이야기 예술에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 작품만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이건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그저 했던 얘기의 반복에 그친다면 아류, 모방, 답습이라는 혹평을 피할 길이 없죠. 이 작품처럼요.

디테일한 무엇도 이야기의 정형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야기의 구성 요소에 초정밀 현미경을 들이댄 것 같은 치밀하고 세세한 디테일은 뻔한 이야기에 활력을 부여합니다. 그런 활력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은 그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데에 소홀합니다. 소홀한 정도가 아니라 안일하고 게으릅니다. 작가의 솜씨가 썩 그리 좋지 못합니다.

 

선재라는 캐릭터에 결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알렉시티미아라는 소재를 다룬 방식에 대해서라면 작가는 그럭저럭 해냅니다. 이 아이를, 할머니 말마따나 괴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재를 다루는 방법에 작가만의 차별성이 드러납니다. 물론 증상에 일관성이 없고 불분명한 묘사가 많은 점이 걸리긴 하지만, 작가 말대로 사실에 근거하되 상상력을 가미한결과라면 어느 정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아이의 대척점에 놓인 인물, ‘이수에게 있습니다.

 

이수(곤이)’는 다른 의미의 괴물입니다. ‘닥치고 양아치수준이죠. 이 아이가 떼쟁이에 반항을 일삼는 데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이 아이가 사라진 후에 겪었다는 일엔 실체가 없습니다. 설명이 없기 때문인데, 아이가 유괴를 당한 건지, 단순한 실종인지, 중국인 노부부가 맡아 키웠을 때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데, 감금인지 아니면 자의에 의한 것인지, 그 중국인들은 아이를 맡아 키우는 동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신고도 안 한 건지, 전혀 힌트가 없습니다. 그 동안 아이의 삶이 어땠는지 작가가 입을 철저히 다무는 통에 아이의 불행이 전혀 실감되질 않고, 그 결과, 밑도 끝도 없는 곤이라는 캐릭터가 생겨납니다. 독자들이 이 캐릭터에 공감할 수 없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죠. 이 인물과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케미에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마음으로 작품을 읽지 못하고 눈으로 문장만 좇습니다. 이런 겉 핥기 식의 독서가 독자 탓일까요?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철사라는 인물도 어이없습니다. 작품에는 이 인물을 그저 말도 못할 악행을 일삼는인물 정도로 얼버무리고 있어요. 이 인물은 그냥 그렇다 칩시다. 그렇다면 막 나가기로 한 곤이가 이 인물을 찾아간 이유가 뭘까요? 철사로 대변되는 그 세계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길래, 철사에게 붙음으로서 곤이가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곤이가 앞으로 처할 위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악한 것인지 공감을 할 수 없는 독자들은 그 장면에서 작가의 노림수는 그저 무용지물이 됩니다.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충만되어야 할 위기의 순간에서 독자들이 목격하는 건 조폭 영화를 패러디한 것 같은, 생기와 감정이 없는, 찌꺼기 같은 장면이 전부입니다.

 

국면마다 필연이 없으니, 이야기는 그저 기계적으로 흘러갑니다. 이쯤 해서 갈등하고, 이쯤 해서 다투다가, 결말이 다가오니 얼렁뚱땅 화해시키는, 그런 모양새입니다. 얼개를 짜는 것에 작가가 기울인 노력, 고민한 흔적이 보이질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안일하고 게을러 보여요. 작품을 마주한 독자들에 대한 배려도 일절 없습니다.

 

클라이맥스를 거치며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에도 별로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폭력을 방관하는 것도 폭력, 맞습니다. 소극적으로나마 폭력에 동참하는 거죠. 하지만 곤이를 찾아나서는 윤재의 동기로는 역부족입니다. 곤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윤재는 짐작만 할 뿐,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게다가 작가의 주장엔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 맞는 말을 하고 있긴 한데, 그것을 강요합니다. 독자로서 비난 받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작품 초반, 괴한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건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상자가 일곱 명이었는데, 그 중엔 남자를 말리러 온 대학생도 있었습니다. 작품 내내 이 사람은 그냥 잊힙니다.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작가의 주장에 근거를 마련하려면, 윤재가 이 사람을 기리거나, 적어도 한 마디 언급은 해줘야 합니다. 폭력을 방관하는 세태에 일침을 놓으려면 그러지 않은 사람의 존재를 부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경찰이 출동한 걸 보면 분명 현장 주변의 사람들 중엔 신고를 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과연 폭력 현장에서의 방관자라고 한꺼번에 싸잡아서 비난해도 괜찮은 걸까요? 심지어 작가는 모르고 밟은 벌레들에게조차 사과하길 바랍니다. 제가 읽은 책이 싯다르타 전기입니까??

 

어떤 상황에 대응하고 반응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곤이는 그 현장을 지켜보기만 한 윤재를 비난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방향 없는 증오와 분노로 망치와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는 미친 사람에게 작정하고 달려들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더군다나 열여섯 짜리 아이가?

 

작가의 이런 도 넘은 자기 주장은 윤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보입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선재를 주위 사람들은 이상하게 봅니다. 슬픔의 표현은 다양합니다. 땅을 치며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릴 수도, 너무나 큰 충격에 멍해질 수도 있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아 눈물은커녕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저는 봤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하다고 뒤에서 수군거릴 일이 아니라 걱정할 일입니다. 정신적 외상이 더욱 심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 작품의 많은 문제들을 아울러 적는다면, ‘설득력이 없다는 겁니다. 인물들이 느끼는 슬픔, 분노, 좌절 같은 감정이 와 닿질 않습니다. 공감이 안 돼요. 작가의 시선은 관념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겉보기엔 다 같은 수박이지만 그것을 잘라보기 전에는 그것이 빨간 수박인지, 노란 수박인지, 씨 없는 수박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저 초록색 바탕에 검은 줄 무늬만 보고 수박이라고 말하고 있죠. 이런 피상적인 이야기는 독자들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윤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타인들에게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곤이는 왜 저런 겉멋만 잔뜩 든 양아치처럼 구는지, 도라라는 아이는 왜 등장했는지, 치열하게 대립하던 두 아이가 가까워진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선재는 곤이의 진짜 모습을 안다고 자부하는데 그런 확신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도둑 누명을 쓴 곤이가 자기 변호 한 마디도 안 하고 갑자기 막 나가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무엇인지, 윤재가 곤이의 위험에 뛰어든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기타 등등. 몇몇 의문에 대해서 작가가 설명을 아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우연과 비약에 기댄 나머지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야기는 유야무야 흘러갑니다. 문장도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흡인력 있고 인상적인 묘사도 더러 보입니다. 플롯에 심각한 구멍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피상적이라 그것에 푹 빠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인물들조차 꼭두각시처럼 보입니다. 감정 이입에 실패한 독자들은 인물들 어깨 너머로 그 세계를 보게 됩니다. 강 건너 불 구경은 불에 대한 공포나 위기를 배제합니다. 저 불이 나한테까지 올 일은 거의 없으니 현장의 긴박감을 느낄 기회가 차단됩니다. 결국 이야기는 시종일관 지루하기만 합니다. ……

 

출판사는 책의 뒷표지에 영화보다 강렬한, 드라마처럼 팽팽한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의 탄생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과장됐습니다. 지나치게 선전적이고 그 의도가 노골적입니다. 무엇보다 한국형이란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한국형의 근거가 무엇인지 책 어디에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6창비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이랍니다. 음... 뭐,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