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이 ‘수퍼 히어로’를 꿈꾼다지만 그건 명백한 오류이고 착각입니다. 그런 소망은 활발한 성격에 적극적이고 쉽게 말해 나대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지,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낯을 몹시 가리고 눈에 띄는 걸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저 같은 사람은 억만금을 줄 테니 그 짓을 하라고 하면 대답은 언제나 ‘싫어’입니다.
하늘을 날거나 초인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한다거나 악당들과 싸운다거나 하는 일은 꽤 귀찮고 위험천만해 보입니다. 저에게도 나름의 정의감은 있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은 약간 다릅니다. 변명하자면 저런 식은 아니라는 거죠. 게다가 쫄쫄이라니.
내가 ‘그들’이 되기는 싫지만 책이나 영화 속에서 그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좋습니다.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여러 영웅들이나 유관순이나 안중근, 김구 같은 영웅들은 물론이고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주인공이나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주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견공(犬公)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그 익숙함, 뻔함에도 늘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도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아크 플롯(arch plot)’의 히어로 스토리죠. 주인공은 처음엔 별 볼일 없지만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는 약간의 자만과 이기심의 단계를 거쳐 공적인 희생에 몸을 던집니다. 주인공과 대적하는 악당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명백한 악당이며 연민이나 동정, 이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다리던 클라이맥스에서는 주인공과 악당이 드디어 맞대결을 하고 주인공의 승리와 함께 훈훈한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 이야기를 거치며 주인공은 (내적으로) 성장하고 그 주변 인물들 역시 크고 작은 성장을 이룹니다.
영화는 이쯤에서 감동이 있어야 하고 저기서 웃음, 요기선 분노, 저쯤에선 긴장을 풀어주는 눈물이 나와야 한다는 공식을 잘 알고 있습니다. 뻔하긴 해도 이런 아크 플롯에는 익숙한 이야기를 능숙하게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의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데엔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는 인물이 필수적입니다. 아무리 봐도 ‘뻥’인데, 그 뻥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충분히 감정이입을 하고 완전히 몰입된다면 관객들은 그이야기를 ‘있을 법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주인공인 ‘빌리’는 대단히 잘 구축된 캐릭터입니다. 위탁 가정을 떠도는 빌리는 자신의 생모를 찾는 게 목표입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으로 어떤 위탁 가정에서도 적응을 못하죠. 그러다 우연히 초능력을 얻게 되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한편, 자신이 고아가 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진실은 빌리에게 또 다른 좌절을 안겨주지만 빌리는 자신의 행복보다는 공공의 행복을 추구하기로 결심합니다.
주인공의 갈등은 지극히 개인적(내적)인 것이고 그것을 극복(혹은 해결)하면서 주인공의 액션 영역은 외부로(사회로) 확장됩니다.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수퍼 히어로가 되는 거죠.
영웅으로서의 빌리는 정서적으로는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혹은 과거(어린 시절)로 퇴행하고픈 성인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캐릭터처럼 보입니다. 이를테면 ‘레트로(retro)’의 요소들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욕망, 과거를 지향하고 살아온 세월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영화가 대중에게 호응을 구하고 있는 방법은 대단히 영리해 보입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능숙하게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강한 영화입니다. 관객들이 이미 익숙한 것들에 의지해 그 기대에 호응하려는 걸 보면 (좋은 뜻에서) 유들유들해 보이기도 하고요. 곳곳에서 웃음이 터지다가 싸움에 임할 땐 진지해지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영웅 서사의 통쾌함이 있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역시 수퍼 히어로 영화는 이렇게 밝고 유쾌해야 제격인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유독 ‘복고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키덜트(어른이들)’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아서인 것 같습니다. 건장한 성인의 육체에 내면은 아이인 주인공도 그렇고, 특히 알록달록한 원색의 유니폼들은 80년대 유행했던 TV의 어떤 초인물 외화 시리즈를 연상하게 만들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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