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리아’는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는 남편,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도망칩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간신히 넘기고 언니의 친구 집에 숨어든 세실리아는 대문 밖 코앞까지도 못 나갈 정도로 겁에 질려 있습니다. 남편과 불행한 결혼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겠지요.
그러던 세실리아는 남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남편에 의한 상처와 그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던지 남편의 유골함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세실리아는, 생전에 유망한 광학도였던 남편의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고 겨우 마음의 주름을 펴게 됩니다. (돈이 좋긴 좋군요) 하지만 평화도 잠시. 세실리아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우리의 주인공은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모습을 숨긴 채’ 자신을 스토킹하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영화는 롤러코스터 같습니다. 시작과 더불어,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남들이 보기에) 헛소리를 해대는 세실리아와 그 주변을 느긋하게 보여주더니, 남편의 유산을 받는 시퀀스를 기점으로 점점 속도를 높여갑니다. 상당히 빠른 유속으로 흐르는 물처럼 이야기는 관객들을 빨아들입니다. 관객들은 세실리아가 겪는 황당한 일들을 함께 경험하고 그녀의 두려움과 의심, 의문들을 공유합니다.
에이드리안은 살아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모습을 감출 수 있었을까요. 그가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꾸며낼 수 있었을까요.
영화는 이 의문들을 풀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합니다. 영화의 이런 상당한 속도감은 뜻밖에 ‘과감한 생략’에서 나옵니다.
영화는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고, 에이드리언의 폭력은 어느 정도였는지, 그의 정신 상태엔 어떤 문제가 있는지,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트는 어떤 원리이고 단지 광학 기술만으로 제작이 가능한 건지 등에 대해선 최소한의 힌트만 던져놓을 뿐,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보통 이런 의문들이 찌꺼기처럼 남으면 (저 같은) 관객이라면 이런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완전 껍데기뿐이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불만을 잠식시키기 충분하다는 사실이 꽤 아이러닉합니다. 영화가 던지는 최소한의 힌트만으로 영화 속 세계를 짐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귀가 딱 들어맞는 설명과 이해가 필수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 영화의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고난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의 과정과 그에 따르는 액션입니다.
영화는 엄청난 속도감으로 오로지 세실리아가 처한 고난과 문제 해결에만 집중합니다. 영화는 도무지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관객 역시 플롯의 작은 구멍들은 젖혀놓고, 의식은 하고 있지만 문제 삼지 않은 채 주인공의 활약에 완전히 몰입을 하게 되는 거죠.
영화는 호러와 미스터리의 요소를 두루 아우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미스터리, 후던잇(whodunit)장르의 플롯에 더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매우 그럴 듯한 추리물입니다.
이야기 속의 세실리아는 피해자이면서 용의자이며 탐정이기도 합니다. ‘히치콕(Alfred Hitchcock)’ 영화에서 흔히 보는 ‘누명쓴 남자(wrong man)’가 변이된 인물이죠. 궁지에 몰린 세실리아는 자신에게 씌워진 오명과 혐의를 스스로 벗고 자신에게 해를 가하려 하는 범인의 정체를 밝혀야 합니다. 세실리아는 자신이 미친 게 아니고 명백히 제정신이며 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 거기에 한술 더 떠, 허무맹랑한 만화나 SF 영화에 나올 법한 ‘투명인간’의 존재와 그가 바로 죽었다던 남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관객들은 이런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을 통해 혼란을 겪다가 희생양(scapegoat)이 등장하고 나서는 의외의 범인과 기상천외한 결말을 차례로 맞이합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엔딩까지의 장면들은 하드보일드의 맛도 납니다.
이 영화엔 오락 영화로서 갖추어야 할 거의 모든 요소들이 즐비하고, 그것들은 꽤 성공적입니다. 내면의 치명적인 손상을 딛고 여전사로 거듭난 세실리아를 연기한 ‘엘리자베스 모스(Elisabith Moss)’의 연기가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큰 몫을 해냈다는 건 두 말할 나위도 없죠.
사족
‘투명인간’이란 소재를 내세운 영화들은 꽤 많지만, 가장 최근(2000년)의 ‘폴 버호벤(Paul Verhoeven)’ 영화와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할로우 맨(the Hollow Man)》은 과학적인 배경이 비교적 치밀한 SF였고, 외관은 미치광이 과학자 살인마가 등장하는 ‘슬래셔(Slasher) 호러’였죠. 그 영화보다 이 영화는 소재에 대해 다소 소홀한 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달랐으니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도 약간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또한 ‘SF-Horror’ 장르의 걸작인 82년의 《심령의 공포(the Entity)》를 연상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꽤 많습니다. ‘오마주’가 아닌가 할 정도로요. 어떤 장면인지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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