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망스럽다. 별로 기대는 안 했지만.
현재의 일이 아닌 소재와 배경을 주재료로 삼는 판타지나 호러, SF장르에서, 독자로서의 내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건, ‘내가 그 세계에 공감할 수 있는가’이다. 다르게 말하면 ‘작가가 나를 충분히 믿게끔 설득하고 있는가’ 정도겠지. 일단 작가가 제시한 설정에 설득되고 나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의 모든 작품을 섭렵한 건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작가가 그 일에 참 미숙하다고 생각한다.
취향 운운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취향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이야기에 숭숭 뚫린 구멍이 훤히 보이는 건 작가가 그냥 못 쓰는 거다.
솔직히 말해 보자. SF 장르는 거의 절반이 아이디어다. 그게 맞다. 그런데 나머지는? 현실이 아닌 그것을 독자들이 믿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디어만 둥둥 떠다니는 꼴이 된다. 인물들이 무슨 일을 해도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감정이 안 느껴진다.
김초엽의 첫 소설집에서 봤던 그런 문제가 여전히 보이는 건, 혹시 매너리즘에 빠진 건 아닌지 작가가 스스로 점검해 볼 일이다.
작가가 출판에 너무 열을 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독자로서 살짝 거부감이 든다. 작가의 책이 그나마 잘 팔리는 건 작품들이 좋아서라기보다 아직 우리나라 SF문학 시장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한 증거로 보인다. 기반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꼭 거쳐야 하고 그 기간동안 우후죽순 선택안들이 다양하게 쏟아지는 것 또한 필요한 일지만 독자들은 무조건 읽는 사람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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