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레지아는 파리에 불법 체류 중인 브라질 인입니다. 더군다나 티레지아는 불완전한 여성의 몸을 가진 트랜스섹슈얼이에요. 여성의 성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르몬 주입에 의지해야 하고, 아직 남성의 성기는 갖고 있으며, 완전한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큰 수술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적당한 직업도 없이 파리의 어둑한 홍등가에서 몸을 팔던 티레지아는 손님으로 위장한 남자에게 납치당하고 감금당합니다. 그 와중에 호르몬 공급이 끊긴 티레지아는 점점 본래의 성징이 나타나게 되고,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남자의 공격으로 시력을 잃은 후, 자신에게 예지력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줄거리만 본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요?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티레지아가 감금당하고, 남자와 티격태격하다가 결국엔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전반부의 이야기이고, 피를 흘린 채 숲속에 버려진 티레지아가 안나라는 어린 여자의 도움을 받아 회복하여 (그리스 신화의 티레지아가 그랬듯) 예지 능력을 보이는 것은 후반부의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로 이어질 수 있지요? 그런데 이어집니다. 영화의 목적을 생각해본다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설정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에요.
영화는 표면적으로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티레지아는 무척 긍정적인 캐릭터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신의 삶과 행복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트랜스섹슈얼의 삶은 그녀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타고 났을 뿐이지요. 영화 속에서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트랜스섹슈얼 자체의 삶이 어렵고 힘든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고, 그렇지 않은 듯이 살려고 할 때, 삶은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길 원하는 사람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수술이라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그건 왜곡된 수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한 과정일 뿐입니다.
이러한 영화적인 메시지는 예지 능력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후반부의 티레지아의 모습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시력을 잃은 대신, 전에 없던 특별한 능력이 갑자기 생긴 것에 대해 티레지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을 주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지요. 그녀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입니다.
결국, 영화는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결정하는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며 불행해질 수 있고,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스스로에게 감사하면 더 없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속도는 굉장히 느립니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이어주는 시퀀스가 굉장한 폭력으로 치장되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매우 정적입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중반의 폭력이 더욱 충격적인지도 모르겠어요.
몇몇 이미지 씬들을 제외하고는 롱테이크도 많고요. 카메라도 거의 움직임이 없어서 어쩔 땐, 피사체나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화면 밖으로 밀려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화면들이 꽤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티레지아를 감금한 장소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 앞부분은 더욱 그래요. 완전하지 않은 여성과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남성, 두 사람이 공간은 물론이고,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묘한 성적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조차도 조용하고 느립니다. 영화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티레지아와 프랑수와 신부의 대화 장면에서조차 그렇습니다. 그로 인해, 서로를 견제하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와 그 의미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프랑수와 신부의 입장에서 티레지아는 신을 거역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티레지아 그녀 자신은 오히려 자신의 삶 자체를 신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 일상의 모호함은 부러 감독이 의도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모호한 상황 설정과 몽환적인 분위기는 일종의 동화적인 느낌을 줍니다. 게다가 영화는 티레지아가 감금된 장소와 나중에 그녀를 구원해준 안나의 집이라는 공간을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중 있는 캐릭터도 고작 네 명 뿐이고요. 꼭 이런 영화에서 리얼리티 운운하며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영화의 주제를 이끌어내는 방법도 매우 좋습니다. 트랜스젠더 연예인이 결혼을 하고, 그것이 보도되는 요즘, 성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푸는 것은 심지어 역차별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모두 이해하고, 그런 문제에 충분히 관대하니, 더 이상 이슈화하지 말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가요? 아직도 동성애자들이나, 트랜스섹슈얼에 대한 차별이나 스테레오타입은 건재합니다. 아직 멀었다고요. 여성 운동의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사라진 건 아니죠.
티레지아에게 가해진 폭력은 충분히 당위성을 같습니다. 티레지아를 납치한 남자의 행동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요. 그 사람은 내레이션을 통해 스스로를 소개하듯이, 진짜보다는 가짜에 더 쉽게 매혹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금방 시들해지는 생화보다도 두고두고 오래 볼 수 있는 조화를 사들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요즘은 기술이 매우 좋아져서 조화 같지 않은 조화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믿고 있는 남자가, 자신이 납치한 여자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드러난 폭력성은 이야기 안에서 갈등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증폭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현대인들의 이중적인 자아상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전반부에 티레지아를 납치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와 후반부의 프랑수와 신부는 모두 같은 배우가 연기하고 있습니다. 같은 인물일 수는 없을 테고, 대체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본인 스스로의 생각이지만, 현대인들의 이중성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적 트릭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폭력적인 초반부의 남자를 연기한 배우가 나중에 신부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고, 진짜를 경멸하고, 거짓에 매혹된다는 남자가 결국 티레지아가 (상징적으로) 가짜 여자임을 알고 당황하여 공격한다는 설정 자체가 강력한 아이러니이니까요.그건 어쩌면, 숱한 짝퉁들처럼 속속들이 거짓뿐이거나, 이미지메이킹을 위해서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비유였을지도 모릅니다.
사족이지만, 전반부의 티레지아를 연기한 배우와 후반부의 그녀를 연기한 배우는 각기 다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호르몬 효과가 좋을 때엔 여자 배우가, 그리고 약발이 닳았을 때엔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고 합니다. 어쩐지, 아무리 호르몬의 효과라고 우기고 있지만 얼굴이 하나도 안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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